작성일 : 06-07-28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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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우리도 목욕탕에 좀 가요."
우리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대중목욕탕에 가신 적이 없다. 어릴 때 주말이 되면 목욕탕에 가자고 졸랐지만 아버지께서는 "집에서 매일 샤워하는데, 사람 많고 애들 시끄럽게 뛰어노는 목욕탕은 왜 가느냐"며 손사래를 치셨다.
딸만 있는 아버지들은 아들과 함께 목욕탕 가는 게 소원이라는데, <7막7장>의 홍정욱도 아버지와 단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목욕탕에서 유학 결심을 말했다는데, 나는 그냥 "아버지는 목욕탕을 싫어하시나보다" 하고 생각했다.
이처럼 목욕탕에 가는 걸 안 좋아하시는 아버지 덕분에 나 역시 지금까지 목욕탕에 가본 적이 손에 꼽을 정도다.
친구들과 함께 목욕탕으로 피서가다
방학임에도 불구하고 보충수업 때문에 학교에 나와 찌는 듯한 더위와 공부, 그리고 입시의 불안함과 싸워야했던 고등학교 2학년 때의 여름이었다. 수업이 끝난 뒤 살이 타들어갈 것 같은 햇빛을 받으며 집으로 가던 중 한 친구가 툭 던지듯 말을 꺼냈다.
"여름에 이게 뭐냐, 보충수업 때문에 피서도 못가고. 야! 우리 목욕탕이나 갈까? 어차피 피서도 못 가는데 시원한 냉탕이라도 가자. 어때?"
"엥? 목욕탕?" 갑자기 귀가 솔깃해졌다. 아버지 때문에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목욕탕인데 이럴 때 친구들을 따라서라도 한번 가보고 싶었다. 다른 한 친구가 차라리 수영장에 가자는 좀 더 발전(?)된 제안을 했지만 나는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그러지 말고 수영장이나 가자. 애들도 아니고 무슨 목욕탕에서 물놀이를 하냐."
"나 목욕탕 한 번도 못 가봤단 말이야! 그냥 목욕탕으로 하자. 응? 응?"
그러자 친구들은 "얘는 왜 목욕탕도 못 가봤지?" 하는 신기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고 "그러자! 얘 소원이라는데 한번 가주자!"라는 또 다른 친구의 말에 드디어 우리의 '목욕탕 방문'이 결정됐다.
"학생 등 좀 밀어줄래?"
그렇게 친구들을 따라 난생 처음 가본 목욕탕은 정말 신나는 '놀이터'였다. 우리는 평일 낮이라 한산했던 목욕탕을 거의 점령하다시피 했다.
특히 비록 수영장에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작았지만 그래도 무려(?) 왕복 10m에 가까운 큼지막한 냉탕은 더위에 지친 우리에게 최고의 피서지였다. 친구들과 처음으로 알몸이 되어 냉탕에서 신나게 물놀이는 하던 나는 동해바다도 부럽지 않았다.
냉탕에서 한바탕 물놀이를 한 뒤 친구들은 "야, 이젠 땀 좀 빼자. 넌 사우나 가본 적 없지? 따라와. 너는 초보자라서 잘 못 견딜 걸?"이라며 마치 목욕탕 전문가인 것처럼 나를 이끌었다.
친구들을 졸졸 따라 사우나로 걸어가던 중 혼자서 때를 미시던 한 할아버지께서 나를 부르셨다.
"학생, 나 등 좀 밀어줄래? 도저히 팔이 안 닿아서 힘드네. 허허."
"저요? 예, 그러죠 뭐."
그날 목욕탕에 처음 가본 나는 때 밀어본 경험도 일천했지만 할아버지의 넉넉한 웃음은 도저히 거절하기 힘들었다. 그렇게 나는 얼떨결에 그 할아버지의 등을 밀어드리게 됐고 친구들은 할아버지의 말씀을 못 들었는지 뒤도 안돌아보고 사우나로 향했다.
나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며 할아버지의 등을 밀어드렸고 할아버지께서는 아까의 넉넉한 웃음과 함께 나를 마치 손자 대하시듯 말을 거셨다.
"중학생은 아닌 것 같고, 고등학생?"
"예, 2학년이에요. 보충수업 끝나고 친구들하고 왔어요."
"그렇구나. 어느 고등학교 다니는데?"
"○○고등학교 다녀요."
"그래? 거기 나도 알지. 이 동네 사는구나. 학생은 이름이 뭐야?"
"윤영섭인데요."
"윤영섭… 학생은 착하네. 요즘 애들은 등 좀 밀어달라면 모른척하고 그냥 가더라고. 허허."
할아버지께서 이름까지 물어보시는 것이 약간 이상했지만 그래도 "분위기가 좀 어색하니 그러신가 보다" 아니면 "등 밀어주는 것이 고마워서 그러신가 보다" 하고 생각했다.
생애 첫 대중목욕탕에서의 목욕을 끝내고 시원한 식혜를 마시며 집으로 가던 중 한 친구가 내게 한수 가르쳐주듯 말했다.
"너 아까 그 할아버지 등 밀어드렸지? 하여간 순진하기는. 그럴 때는 그냥 못들은 척 하는 거야. 모르는 사람 등을 힘들게 왜 밀어 주냐. 너는 아직 목욕탕 초보라서 그래."
나는 그 친구의 말이 그다지 공감되지 않았지만 그냥 "뭐 어때…" 하고 조용히 웃어넘겼다.
등 밀어주고 선행상 받다
그 다음날, 보충수업을 위해 어김없이 학교에 갔다. 조회 시간에 출석을 부르시기 위해 들어오신 담임선생님이 대뜸 나를 보시며 "윤영섭, 너 어제 목욕탕 갔었냐?" 하고 물으시는 거였다.
"오늘 아침 옆에 있는 △△고등학교에서 전화 왔다. 어제 네가 목욕탕에서 등 밀어드린 분이 그 고등학교 교감선생님이자 우리 학교 교장선생님의 친구 분이시래."
전혀 생각지도 못한 소식에 나는 물론이고 교실 전체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나와 함께 목욕탕에 갔던 친구들은 나보다 더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분께서 오늘 아침에 우리 교장선생님한테 전화하셔서 너 칭찬해주라고 하셨대. 요즘에 보기 힘든 착한 학생이라나. 아무튼 너 이번 달에 선행상 받게 됐다. 하여간 저 녀석은 운도 좋아요. 하하."
그때 우리학교는 매달마다 선행을 한 학생들을 몇 명씩 뽑아 도서상품권을 선물로 주고 있었다. 그동안 다른 상들은 가끔 받아봤지만 유독 선행상과는 인연이 없었던 나는 얼떨결에나마 선행상을 받을 수 있었다.
만화나 드라마에 나올법한 사연에 교실은 한바탕 웃음바다가 됐다. 그리고 나의 '특이한' 선행상 수상 사연은 삽시간에 2학년 전체로 퍼져나갔다.
"야, 5반 윤영섭이 목욕탕에서 어떤 할아버지 등 밀어주고 이번에 선행상 받는대!"
"뭐? 도대체 그게 무슨 말이야? 좀 구체적으로 얘기해봐."
나는 한동안 학교에서 화제의 인물이 됐고 나와 함께 목욕탕에 갔었던 친구들만이 "아! 내가 밀어줄 걸" 하는 표정으로 긴 한숨을 내쉬며 할아버지의 부탁을 모른척했던 옛 행동을 안타까워할 뿐이었다.
내가 잠시 겸손함을 잊은 채 그 친구들에게 선행상을 자랑했다.
"거봐, 나처럼 상을 바라지 않고 선행을 했을 때 비로소 이렇게 상도 타는 거야. 이런 게 바로 진정한 선행상이라고 할 수 있지. 이제부터 날 '선행상 탄 윤영섭'이라고 불러라. 우하하."
그렇게 '여름에 동네 목욕탕으로 피서 갔다가 어떤 할아버지 등 밀어드리고' 받은 내 학창시절의 유일한 선행상은 우리 집 장롱 속에 소중히 보관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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