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07-02-26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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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연휴, 따뜻한 마음을 나눠준 할머니
조명자(yooun29) 기자
설 명절을 쇠기 위해 서울행 기차를 기다리던 며칠 전 일이다. 기차 시간보다 조금 빠르게 역사에 도착했는데 역귀성 탓인지 구내는 비교적 한산한 편이었다. 출발 시간까지는 50여분이 남았기에 조금 이르지만 점심을 해결하기로 했다.
역사 한 귀퉁이에서 간단한 식사류와 차를 팔고 있는 스낵코너로 들어갔다. 김밥을 시켜놓고 막간을 이용해 부지런히 신문을 훑어보기 시작할 즈음, 허리가 구부정하신 할머니가 짐 보따리를 들고 들어오시는 모습이 보였다. 점심 때 음식점으로 들어오신 양반이니 간단하게 끼니를 해결하시기 위해 오셨겠지, 무심히 생각하며 다시 신문으로 시선을 돌렸는데 할머니가 그 많은 의자를 내버려두고 하필 내가 앉은 탁자 옆 귀퉁이에 쭈그려 앉으시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검은 색 장바구니 속에 담긴 물건들을 주섬주섬 꺼내기 시작했다. 처음에 안이 훤히 비치는 비닐 봉투가 끌려 나왔다. 그 속에는 되는 대로 집어넣었는지 한데로 엉킨 할머니 속옷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 노란 조같이 생긴 곡식에 드문드문 붉은 강낭콩이 섞여 있는 비닐봉지도 꺼내 놓으셨다.
'짐 정리를 다시 하시려고 저러시는가?'
그때부터 할머니를 유심히 지켜보기 시작했는데 이런, 할머니는 전혀 예상치 못한 행동을 하시기 시작했다. 가방에서 느닷없이 숟가락 하나와 비닐 위생봉투를 꺼내시더니 가방 속에서 찰밥을 덜어내는 것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할머니가 점심 값 아끼려고 싸오신 찰밥으로 점심을 해결하시는 줄 알았다. 이후 할머니는 먼저 꺼내놓은 노란 조가 담긴 봉투로 숟가락을 들이 밀었다. 숟가락으로 듬뿍 퍼 올리시는 노란 조밥. 그것은 내가 생각했던 생 조가 아니라 강낭콩을 섞어 지은 조밥이었다.
찰밥과 조밥을 비닐봉투에 담으신 할머니가 나무젓가락을 꺼내들더니 힘겹게 일어서셨다. 할머니가 그 밥으로 점심을 해결하실 것 같으면 어묵 국물이라도 사드려야겠구나 속으로 계산하고 있었는데 할머니는 밥 봉투를 들고 어디론가 발길을 돌리셨다.
주문한 김밥이 도착했지만 궁금함을 참지 못한 나는 할머니 뒤를 따랐다. 잠시 후 역사 문을 나선 할머니. 할머니는 유리문 앞턱에 쪼그리고 앉은 허름한 사내 곁으로 다가서셨다. 그리고는 허리를 구부려 그 사내 턱 앞으로 밥 봉투를 내미셨다.
모자를 푹 눌러쓰고 비스듬히 앉아 있던 사내가 얼굴을 들었다. 마흔이 조금 넘었을까? 다크서클이 짙게 밴 눈매에 홀쭉한 뺨. 한 두어 끼는 문제없이 건너뛰었음직한 기운 없는 행색이었다. 온 나라가 들썩거리는 명절 연휴, 무슨 사연인지는 모르지만 그 사내가 마음 놓고 찾아들어갈 집에 이상이 생긴 것은 틀림없는 것 같았다.
남루한 사내에게 밥을 들이미는 할머니도 가타부타 말씀이 없으셨다. 잠깐 주춤했던 표정의 사내 역시 말없이 봉투를 받았다. 그리고는 희미하게 고개를 숙였다. 변변한 밥그릇도 아니고 비닐봉투에 담긴 찰밥덩이. 그 속에 담긴 측량할 수 없는 할머니의 측은지심을 모를 사람 있을까.
멀찍이 서서 그 두 사람의 행동을 묵묵히 지켜보면서 차마 가방 속에 든 카메라를 꺼내 들 용기가 나질 않았다. 그 사내 정도는 아니지만 할머니가 입고 계신 두꺼운 스웨터 역시 그리 좋아 보이진 않았기 때문에. 아니, 아니 두 양반의 모습을 도둑 촬영한다는 것은 어쩌면 그 분들을 모욕하는 것 같은 생각에.
제대로 된 가방도 아니고 흔하디 흔한 검은 천 장바구니에 살림을 담으신 할머니. 허술한 할머니의 입성이 내내 가슴 아팠다. 생각 같아서는 할머니 모시고 따끈한 우동이라도 대접하고 싶었지만 시간도 없었고 또 섣불리 아는 척 하기도 쉽지 않았다.
누구 집엘 가시는지, 찰밥에 조밥까지 싸들고 가시는 할머니. 할머니 모습을 보자니 얼마 전에 들었던 우스갯소리가 떠오른다. 학문이 뛰어난 아들은 '나라'의 아들이고 돈 잘 벌고 능력 있는 아들은 '장모'의 아들 그리고 일자리 없는 백수 아들은 '엄마'의 아들이라나.
할머니가 혹시 '엄마'의 아들을 가지신 분은 아니신지. 오랫동안 할머니의 잔영을 지우지 못했던 설 연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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