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가족 병수발하며 대학 합격 효녀 희진이의 '작은 기적'

 
노희진(맨 오른쪽)양이 부모님이 지켜보는 가운데 10년째 침대에 누워 생활하는 여동생 희경이의 얼굴을 닦아주고 있다.

10년째 의식불명 동생 돌보다 엄마·아빠도 차례로 몸져누워

중2 때부터 병상 지키며 공부 장학금 받고 3월 延大 입학

설날인 26일 아침 전남 순천시 덕월동 선암마을에 있는 단층 주택. 잠자리에서 일어난 희진이(19·순천여고3)는 눈 뜨자마자 안방 문부터 두드렸다.

"엄마, 저 일어났으니까 이제 눈 좀 붙이세요."

어머니 임정숙(53)씨와 교대한 희진이는 안방 침대에 누워있는 여동생 희경이(13)에게 다가갔다. 동생은 10년째 코에 영양 공급장치를 꽂고 초점 없는 눈을 반쯤 뜬 채 누워만 있었다. 희진이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얇은 파이프 모양의 고무 막대를 동생 입 안에 넣고 막대와 연결된 기계의 스위치를 눌렀다. 기계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동생 입에 고인 침을 빨아냈다.

희진이는 오는 3월 대학생이 된다. 작년 12월 연세대 수시모집 특별전형에 합격했다. 4년간 전액 장학금도 받는다. 합격 통보를 받던 날, 희진이네 가족이 사는 방 세 칸짜리 전셋집에서는 모처럼 온종일 웃음소리가 났다. 어머니 임씨는 희진이를 끌어안고 펑펑 울다가 웃다가 했다.

"내 새끼, 장하다. 앞으로는 내가 희경이 볼 테니 너는 걱정 말고 서울 가서 공부 열심히 해. 알았지?"

희경이가 병석에 눕기 전까지 희진이네 가족은 어려워도 단란하게 살았다. 아버지 노병기(56)씨는 포항에서 과일행상을 하다가 1997년 순천으로 이사해 고물상을 열었다. 어머니 임씨는 두 딸을 키우며 남편을 도왔다.

불행은 10년 전에 시작됐다. 1999년 10월, 가족끼리 교외에 소풍을 갔다. 가족들이 잠깐 한눈파는 사이 희경이가 물 웅덩이에 빠졌다. 119 소방구조대가 병원으로 옮겨 목숨은 건졌지만 희경이는 그날 이후 제 힘으로 일어설 수 없었다. 물에 빠져 20분 정도 호흡이 멎는 바람에 뇌가 손상된 것이다.

희경이는 5년 동안 병원에서 생활했다. 하지만 한 달에 100만원이 넘는 병원비를 감당할 수 없었던 노씨 부부는 2004년 희경이를 집으로 데려왔다. 음식을 삼키지 못하는 희경이는 코에 꽂은 호스로 유동식을 공급받는다. 어머니 임씨는 "지난 10년간, 2시간 이상 길게 이어서 자본 적이 없다"고 했다. 희경이의 입 속에 침이 고여서 기도(氣道)로 흘러들지 않도록 5분에 한 번씩 침을 빼줘야 했기 때문이다.

희진이는 중2 때 이후로는 친구들과 맘대로 놀지 못했다. 학교가 끝나면 어머니와 교대해 동생을 돌보기 위해 곧바로 집으로 향했다. 친구들이 독서실에 갈 때, 희진이는 안방에서 동생 입에 고인 침을 5분에 한 번씩 빼가며 공부했다. 희진이는 "동생을 챙겨야 하기 때문에 공부하다가 졸 수도 없었다"고 했다.

희진이가 고1이던 2006년 9월, 동생 간병에 지친 어머니가 뇌출혈로 쓰러졌다. 다행히 어머니는 수술 후 한 달 만에 퇴원했다. 1년 뒤에는 회사 택시를 몰던 아버지 노씨가 말기암 선고를 받았다. 과로로 몸이 망가진 상태에서 스트레스를 이기기 위해 폭음을 한 것이 문제였다. 병원에 찾아간 노씨에게 의사는 "간에 생긴 암 덩어리 크기가 10㎝도 넘는다"고 했다.

부모가 번갈아 입원할 때마다 희진이는 병원 생활을 해야 했다. 어머니가 입원하면 아버지가, 아버지가 입원하면 어머니가 집에서 동생을 돌봐야 했기 때문이다. 희진이는 부모의 병수발을 하면서 병실 간이의자에 쪼그리고 앉아 공부했다. 밤 10시가 넘어서 병실 불이 꺼지면 복도로 나갔다. 형광등이 밤새 켜져 있는 곳은 복도뿐이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지난해 2월 퇴원했다. 아버지는 간암 치료가 끝나지 않은 몸으로 다시 택시 운전대를 잡았다. 희진이는 어머니와 번갈아 희경이를 돌보며 본격적으로 고3 수험생활을 시작했다.

작년 5월, 희진이는 가천문화재단이 주최한 심청효행대상 공모전에 수기를 냈다.

"동생이 사고를 당한 뒤로는 가족들끼리 외식도 한번 못했습니다. 어머니는 뇌출혈로 쓰러지셨고, 아버지는 간암에 걸리셨습니다. 사람들은 제 상황이 '절망'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저는 동생이 일어나 우리 가족이 다시 행복해질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있습니다."

희진이의 수기는 심사위원들을 울렸다. 이 공모전을 통해 희진이의 사연을 접한 신촌 세브란스 병원은 지난달 아버지 노씨를 서울로 불러 무료로 종양 제거 수술을 해줬다.

'예비 대학생' 희진이는 요즘 아르바이트 자리를 알아보느라 바쁘다. 등록금은 장학금으로 해결됐지만, 교재비와 하숙비를 마련할 길이 막막하기 때문이다.

"대학에 붙어도 등록금 때문에 다닐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적어도 제가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고 싶었어요. 아픈 가족들을 집에 남겨둔 채로 4년간 꾸준히 대학을 다니는 게 가능할지 잘 모르겠어요. 이번에도 최선은 다 해볼 거예요."

희진이는 영문학을 전공해 외국어로도 공연할 수 있는 세계적인 뮤지컬 배우가 되는 게 꿈이다. 희진이는 "언젠가 희경이가 일어서게 되면 내가 공연하는 뮤지컬에 초청해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