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산 쓰고도 책 읽는 일본 [중앙일보]  기사
 

장마가 시작된 얼마 전 도쿄 긴자(銀座)에서 횡단보도를 건널 때였다. 60대 초반의 남자가 오른손엔 우산을 받쳐들고 왼손으론 책을 읽고 있었다. 이게 뭔가. 비가 와서 우산을 들기도 바쁜 와중에 책을 읽다니. 너무 독특하다 싶어 지켜봤더니 신호가 바뀌는 순간까지 책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유별나다 싶었다.

일본에서도 책 판매량은 감소 추세다. 지하철에서 책 읽는 사람도 갈수록 줄고 있다. 그래도 지하철을 타면 세 명에 한 명꼴로 책을 보고 있다. 어떤 이는 책을 펴든 채 졸기도 하지만 책을 읽으려는 열정만큼은 뜨거워 보인다.

한마디로 일본인들은 책 읽기에 미친 사람들이다. 아소 다로(麻生太郞) 총리도 매달 단골 서점을 찾는다. 그가 구입한 책은 신문에 소개돼 그의 관심이 알려지기도 한다. 책 읽기에 철이 따로 없는 것도 특징이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란 말을 별로 들어보지 못했다. 그저 틈만 나면 책을 본다. 노숙자들이 책을 보는 광경도 드물지 않다.

더 둘러보니 일본인의 책 사랑은 도처에서 발견됐다. 돈과 길에도 있다. 5000엔짜리 지폐 인물은 25세에 요절한 근대 여성 소설가 히구치 이치요(桶口一葉)가 차지하고 있고, 와세다대 근처에는 일본의 문호로 추앙받는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 거리가 있다. 이 길을 걸을 때 그가 떠오르는 것은 당연하다.

더욱 흥미를 끈 것은 물에 뛰어들어 자살한 일본 쇼와(昭和, 1926~89)시대의 대표적인 작가 다자이 오사무(太宰治)에 대한 추모 물결이다. 19일 그의 탄생 100년을 맞아 고향인 아오모리(靑森)현이 기념 퀴즈 대회를 열자 애독자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응시 장소를 두 배로 늘려야 했다. 100문항의 퀴즈에는 다자이의 생일을 묻는 것부터 작품명을 나열하거나 내용을 묻는 것이 나온다. 대학에서 이런 작가들을 연구하는 모임이 수시로 열리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일본인의 이런 책 사랑은 68년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에 이어 94년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郞)까지 두 명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를 배출하는 저력이 됐다. 노벨 문학상으론 한·일이 0대2를 기록 중이다. 이 격차를 하루아침에 좁힐 수는 없다. 축구·야구는 정신력으로 승부할 수 있지만 깊이와 저변이 필요한 책의 세계는 차원이 다르다. 닌텐도 게임기가 휩쓸듯 한국에선 90년대 이후에는 계보를 만들 정도로 일본 작가들의 작품이 휩쓸고 있다고 하니까 말이다.

일본에선 책이 나오면 독자들은 벌떼가 된다.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의 신작 『1Q84』는 출판 열흘 만에 100만 부가 팔렸다. 그러곤 우산 속에서, 콩나물 지하철에서 필사적으로 읽는다. 언제 어디서나 독서가 가능한 문고판으로 책을 내는 실용주의도 일본인을 독서광으로 만들었다. 하루아침에 천재 작가가 나타나 노벨상을 받을 수는 없다. 작가들의 분발도 필요하지만 국민의 독서열이 지식 선진국의 밑거름이란 것을 일본에서 절감하고 있다. 주말인 오늘 오후엔 독서 삼매경에 빠져보는 것은 어떨까.

김동호 도쿄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