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만과 편견, 그리고 좀비
제인 오스틴 원작｜세스 그레이엄 스미스 지음 | 최인자 옮김
해냄출판사｜406쪽｜1만2800원
《트와일라잇》시리즈로 전 세계 서점가를 강타한 뱀파이어의 뒤를 이어 이번엔 좀비(살아 있는 시체) 떼다. 제인 오스틴의 명작《오만과 편견》에 좀비를 등장시킨 이 책은 올 초 미국에서 출간되자마자 뉴욕타임스·타임지 등에 보도되며 단숨에 베스트셀러로 등극했다. 공포영화의 고전을 패러디한《무서운 영화》(scary movie), 영화 '트랜스포머'를 패러디한 만화 《트랜스폼어》(incredible changebot) 등 패러디물이 하나의 장르가 돼버린 미국에서도 세기의 고전을 이렇게 작심하고 호러물로 바꾼 예는 거의 없었다.

"재산깨나 있는 독신남자에게 아내가 꼭 필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진리다"라는 원작의 첫 줄은 "한 번 뇌를 먹어본 좀비가 더 많은 뇌를 원하게 된다는 건 누구나 인정하는 진리다"가 됐다. 그나마 이 정도는 약과이다. 19세기 영국에 원인 모를 역병이 돌아 죽은 사람들이 좀비로 부활하고, 주인공 엘리자베스 등 베넷가의 5자매는 소림사의 리우 사부에게서 수련받은 좀비 킬러로 변신한다.

원작을 통해 200년간 전 세계 소녀들의 마음을 흔들어 온 다아시와 엘리자베스의 운명적인 무도회 장면을 보자. 갑자기 유리창이 깨지면서 좀비 떼가 '영원히 변하지 않는 해골의 미소를 지으며' 쏟아져 들어온다. 좀비들이 무도회에 모인 신사·숙녀의 머리통을 호두처럼 깨물던 찰나, 엘리자베스의 아버지 베넷씨가 외친다. "딸들아! 죽음의 펜터그램(주술적 의미의 별 모양)을!" 그러자 엘리자베스 등 5자매는 즉시 독수리 5형제 대형을 취한 후 단검으로 '좀비들의 목을 따기 시작한다'(16~17쪽).

 
▲ 사진=해냄출판사 제공
영화 프로듀서이기도 한 작가는 원작을 대부분 살려놓되, B급 영화의 싸구려 상상력을 총동원해 독자들에게 파안대소를 안긴다. 실은 좀비라는 소재부터 영화적이다. 좀비는 1968년 조지 A. 로메로의 미국 영화 '살아 있는 시체의 밤'(원제 Night of the Living Dead)을 통해 탄생해, B급 공포영화에 단골로 등장했다. 다아시의 사촌인 캐서린 드 버그 영부인과 엘리자베스의 한판 무술 대결은 타란티노 감독의 '킬빌'을, 좀비의 머리를 베어 들고 함성을 지르는 엘리자베스의 모습은 영화 '브레이브 하트'를 연상케 한다. 문학적 감수성과 영화적 상상이 힘을 합해 21세기 독자들에겐 다소 지루하게 읽힐 원작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원작을 소녀 취향의 로맨스 정도로 취급했던 독자라도 인간 본성에 대한 감각적 묘사를 통해 19세기 영국 중·상류층의 위선을 꼬집었던 제인 오스틴의 문재(文才)에 새삼 눈뜨게 될 것이다.

미국에서 이 책의 인기는 식을 줄 몰라, '할리우드의 지성'이라 불리는 여배우 나탈리 포트먼이 감독을 맡아 영화화하고 있다. 유사한 좀비 영화도 활발히 제작 중이다. 사실 좀비는 괴수계(怪獸界)에서 수드라 내지 불가촉천민으로 분류된다. 늑대인간이나 뱀파이어처럼 세련된 것도 아니고, 드라큘라처럼 유럽의 뼈대 있는 가문 출신도 아니다. 지능은 없고 활동성만 남은 데다, 머리를 날려버리거나 불태우면 죽일 수도 있다.

그런데 왜 좀비인가? 타임지는 '뱀파이어가 가고 좀비가 뜬다'는 기사를 통해 "좀비는 시대정신을 반영한다. 뱀파이어는 작년 리먼 브러더스의 파산과 함께 사라지고 경제침체와 함께 좀비가 돌아온 것"이라고 그럴싸하게 분석했다. 미국발 금융위기의 충격파가 채 가시지 않고 있는 지금, 좀비는 '언제 어디서 위기가 찾아올지 모른다'는 사람들의 불안감과 피해의식을 대변한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로메로의 영화로 좀비가 1차 부흥기를 맞이했던 1960년대 역시 극단적인 폭력이 자행되던 베트남 전쟁 때였다.

토종(土種) 좀비도 있다. 소설가 구현씨의 《대학로 좀비 습격사건》(휴먼앤북스)이 패러디한 대상은 2009년 대한민국의 인간군상(群像)이다. 88만원 세대의 불안함, 모텔을 전전하는 성문화, 집단적 관음증이 좀비의 습격 앞에 무자비하게 폭로된다. 고전에 좀비를 투입한 기발함으로 승부하는 《오만과 편견, 그리고 좀비》에 못지않은 한국판 좀비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