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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9-08-24 07:59
3만권의 힘
 글쓴이 : bonappr
조회 : 1,547  
얼굴을 보는 관상(觀相), 그 집의 형태와 구조를 보는 가상(家相)이 있지만, 서상(書相)이라는 것도 있다. 무엇을 '서상'이라 하는가? 서재의 구조와 정돈상태, 그리고 소장하고 있는 서책들의 질과 양을 모두 따져 보는 것을 '서상'이라고 한다. 서상을 보면 그 사람의 정신적 깊이와 수준을 짐작할 수 있다. 다년간의 경험에 의하면 '관상(觀相)이 불여(不如) 서상(書相)'이다.

문필업자인 나는 다른 문필가의 집을 방문할 때 제일 먼저 보는 것이 그 집의 서상이다. 서가에 꽂혀 있는 책들이 어떤 분야의 책들인가. 고전학자의 집에 가면 한문으로 된 고전들이 당연히 많고, 영어나 독일어로 된 서양서들은 별로 없다. 미국으로 유학 갔다 온 학자의 서재에는 유·불·선의 고전이나 한문 서적이 드물다.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인문학자의 서재에는 자연과학 책이 드물다. 아직까지 양쪽을 모두 갖춘다는 것이 쉽지 않은 상황임을 보여준다. 그동안 보았던 인상적인 서재 가운데 하나는 작고한 이규태 선생의 서재이다. 연립주택의 1층 지하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면적은 대략 40평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지하층이라 독립된 분위기가 있었다. 여기에 약 2만권의 장서가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한문 고전도 있었고 국내 인문서들, 그리고 일본에서 간행된 자그마한 책과 문고본들이 많았다. 어느 한 분야에 치우치지 않고 온갖 주제의 책들이 많은 서재라는 점이 특징이었다. 책들 중간 중간에 밑줄을 그어 놓았고, 표시가 나도록 색종이 간지를 꽂아 놓은 책들이 특히 많았다. 생각나면 바로 찾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장서(藏書)가 5000권 정도에 도달하면 독서인이라 할 수 있고, 1만권을 넘어가면 프로의 세계에 입문했다고 본다. 책을 보관하기 위한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서 돈을 써야 하기 때문이다. 1만권이 넘어가면 자기가 책을 쓰는 생산자의 입장으로 전환되는 수가 많다. 작고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장서가 3만권이었다고 한다. 아마도 '서생적(書生的) 문제의식'은 이 3만권의 장서에서 나오지 않았나 싶다. 정치인이 3만권은 쉽지 않다. 각국의 정치지도자 가운데 유례가 드문 장서가가 DJ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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