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06-09-07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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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이라마. 빅터 챈 지음
류시화 옮김
용서의 지혜
10년 전 처음으로 티베트에 여행을 갔을 때 많은 것들이 내게는 놀라움으로 다가왔다. 무엇보다 인도와 네팔 여행으로 다져진 내 몸과 정신을 간단히 쓰러뜨려 버리는 고산병의 위력에 놀랐으며, 오랜된 사원들과 달라이 라마가 살았던 포탈라 궁의 장엄함에 놀랐다. 눈이 부신 히말라야 선살들과 함께 티베트를 제압하고 있는 중국 군대도 놀라움의 대상이었다. 그들은 어디에나 있었으며, 수도 라싸는 물론 외딴 지역까지 이미 중국인들의 세상이었다. 티베트식 양탄자라고 하는 것들도 더 이상 티베트제가 아니었으며, 보리주나 야크 버터 차를 제외하고는 식당에서 나오는 음식들도 티베트 음식이 아니었다.
티베트 불교의 상징인, 라싸 중심가에 있는 조캉 사원 바로 앞에는 중국 정부가 내건 붉은 현수막 하나가 위압적으로 걸려 있었다. 거기에는 '정신 개혁이 문명의 시초' 라고 쓰여져 있었다. 티베트를 강제 점령하고 수많은 사람을 죽였으며 사원과 경전들을 불태운 중국이 동양의 심원한 사상을 간직한 티베트 인들을 향해 정신을 개혁하라고 윽박지르고 있는 것이다. 그 현수막을 바라보는 것 자체가 슬픔 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티베트를 더 자세히 들여다보게 되었는데, 나를 더욱 놀라게 한 것이 한 가지 있었다. 다정하고 호기심 많은 티베트 인들의 삶의 자세였다. 그들이 중국의 침략으로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었는가는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일이다. 가족들을 죽였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감옥에 갇혔다. 중국이 아무리 물질적으로 발달한다 해도 티베트에서 자신들이 저지른 실상을 고백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끝내 정신적으로 타락한 민족이 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거리와 여인숙과 상점에서 만난 티베트 인들은 언제나 웃고 있었고 , 유머와 장난기와 명랑함이 넘쳐 흘렀다. 내 고산병을 치료한 것은 티베트 여의사가 내민 정체불명의 중국산 드링크제 한 병과, 마주칠 때마다 내게 농담을 던지던 (주로 내 장발 머리에 대해)바코르의 여인숙 종업원 롭상의 다정함이었다.
중국의 잔악 행위로 인해 겪은 고통을 화제로 꺼낼 때마다 내가 만난 티베트 인들은 한결같이 '용서'를 이야기 했다. 특히 그 일을 직접 겪은 당사자들이 더욱 그런 자세를 가지고 있었다. 흐린 버터 등잔 아래서 투박한 손과 떨리는 목소리로 자신들의 아품과, 그 아품을 안겨 준 사람들에 대한 용서를 이야기하는 이들의 인간적인 모습은 진한 감동 그 자체였다.
나는 또 티베트를 대표하는 피리 연주자 나왕 케촉과 몇 차례 만난 적이 있다. 티베트 인 특유의 느닷없는 호탕한 웃음과 장난기 때문에 우리는 금방 친구가 되었는데, 그는 한국의 내 집을 방문한 자리에서 자신의 삶과 음악의 근본은 평화와 자비의 정신임을 강조했다.
그리고 그는 연주회를 시작할 때마다 어김없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들에게 자비와 평화가 깃들기를' 기원하는 티베트 기도문을 낭송했다.
훗날 북인도 다람살라와 해마다 큰 법회를 여는 보드가야에서 달라이 라마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티베트 인들의 그런 친절과 용서의 힘이 바로 그들의 영적 지도자로부터 나오는 것임을 깨달았다. 그는 우리가 텔레비전에서 흔히 보듯이 군중을 헤치고 나아가며 방탄 유리 안에서 손을 흔드는 정치인이나 종교 지도자들과는 사뭇 달랐다. 그는 언제나 웃고 있었고, 경호원들을 벗어나 따뜻하게 미소 지으며 사람들의 손을 맞잡았으며, 때로는 다른 사람들의 턱수염을 잡아당기기도 했다. 티베트 수도승들이 흔히 그렇듯, 그의 둥근 어깨는 검손함을 나타내기 위한 무의식적인 몸짓이 오랜 세월 동안 영구적인 상태로 굳어져 인사를 할 때는 마치 곱추처럼 앞으로 굽어 있었다. 그는 아직도 젊은이와 같은 순수함을 갖고 있었으며, 옹서를 이야기할 때는 뜨겁고 진지했다. 그리고 그들의 목걸이와 의상만큼이나 독특한 색채를 지닌 티베트 인들의 용서와 자비의 사상은 세상의 모든 존재가 서로 연결되어 있고 상호 의존하고 있다는 오랜 지혜에서 오는 것이었다.
왜 지금 용서를 말하는가?
달라이 라마가 늘 강조하듯이, 모든 생명 가진 존재는 행복을 최대의 목표로 삼는다. 세속적인 행복뿐 아니라 궁극의 행복에 이르는 것이 우리 모두의 이상이다. 하지만 우리들 대부분은 전생애에 걸쳐 상처와 고통을 끌어안고 살아가며, 그것은 또 다른 생의 비극을 가져오는 인관관계로 이어진다. 문제는 우리 안에 있는 미움과 질투와 원한의 감정이다. 이 부정적인 감정들은 행복에 이르는 길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이며, 그 장애물을 뛰어넘는 유일한 길이 용서라고 달라이 라마는 말한다.
하지만 용서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개인의 차원에서나 큰 공동체 차원에서나 상처는 깊고 오래 간다. 종교를 통해 늘 용서의 의미와 가치를 설득당하지만, 현실에서 우리에게 부당하게 상처를 안겨 준 이들에 대한 감정의 골은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다.
사랑을 배반한 과거의 여인, 은혜를 원수로 갚는 사람, 부당하게 재산을 갈취한 형제, 나를 감옥에 가둔 독재자와 그 정권에 협력한 기득권자들, 더구나 그들이 부도덕하게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용서가 아닌 미움과 복수의 감정이 앞선다.
그러므로, 용서는 삶 속에서 실천할 수 있는 가장 큰 수행이라고 달라이 라마는 말한다. 그것은 인간이 근본적으로 지닌 자비로운 심성과 더불어 오랜 성찰과 명상, 그리고 인과관계의 문제와 사물의 실상에 이르기까지 통찰력을 필요로 하는 일이다. 힌두교 의 오래된 경전 (바가바드 기타)는 '용감한 사람을 보기를 원하면 용서할 줄 하는 사람을 보라. 영웅울 보기를 원하면 미움을 사랑으로 되돌려 보내는 사람을 보라'고 말하고 있다. 용서는 자신안에 갇힌 에너지를 밖으로 내보내 세상에서 선한 일을 하는 데 쓸 수 있게 한다. 용서의 실천은 우리 자신과 이 세상을 치료하는데 가장 중요한 기여를 한다. 상처의 진정한 치유는 용서에서 온다는 것을 우리가 깨닫지 못할 까닭이 없다.
달라이 라마의 순수한 장난기와 유머, 호탕한 웃음소리가 가득한 이 책 (용서)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진지한 탐구와 더불어 달라이 라마 자신의 밝고 긍정적인 성격 때문에 더욱 빛을 발한다.
그는 보통 사람이라면 적으로 생각했을 사람들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게 되었는가? 그의 개인적인 두려움은 무엇인가? 그이 심장은 의학적으로 어떤 상태인가? 그리고 오랜 명상 수행을 거친 사람들은 자신의 신체적인 고통을 어떤 식으로 받아들이는가? 이 책은 이런 의문들에 대한 해답과 함께, 생생하고 감동적인 일화들로 마치 달라이 라마와 마주 앉아 용서와 행복에 대한 대화를 나누고 잇는 듯한 느낌을 갖게 한다.
달라이 라마는 가난, 전쟁, 미움으로 가득한 이 세계에 희망을 가져다준다. 만일 그가 왜 전세계 지성인들로부터 가장 존경받는 종교인인가에 대한 의문을 가져 본 적이 있다면, 이 책은 우리를 그가 살고 있는 방과 그의 여행과 그가 만나는 사람들 곁으로 데려다 줌으로써 그 답을 풀어 준다. 즐거움을 만드는 그의 탁월한 능력과 명랑함, 겸손함,정직함은 곧바로 우리 자신을 비춰 준다.
류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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